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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18952)번 [텍스터의 서재] 
저자 : 한무숙
출판사 : 을유문화사    [출판사의 서재]
출간일 : 1992-12-12
분야 : 문학/수필 도서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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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제목 :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 출판사 : 을유문화사
한무숙 작가의 수필집 '열 길 물속은 알아도'18952 (★★★★☆)
글쓴이
흔적 날짜
2018.03.03 22:41:03 추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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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을 상식으로 넘기지 않고 깊고 꼼꼼하게 생각하는 철저함이 돋보이는 분. 우선 물속과 사람 속의 차이를 논한다. 물속은 공간이지만 인체의 내부와는 다른 사람 속은 수성(獸性)에서 인성(人性), 신성(神性)에 이르는 방대한 영역이 공존하는 무엇이다. 그래서 작가는 한 길 사람 속은 여전히 알 길이 없다고 말한다. 사실 자신조차 잘 알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 아닌가. 그러니 다른 사람을 어찌 바로 보겠는가.

저자는 오욕과 어리석음과 무의미에 차 있기도 하는 시시한 사람들에게 끝없이 끌린다는 말을 한다.(17 페이지) 저자의 이름을 내세운 문학관에 간 기억이 난다. 2층 서고에 갔더니 수많은 책들 가운데 조선왕조실록 전집이 눈에 들어왔다. 창작에 활용한 자료였으리라.

그런데 그런 책들 뿐 아니라 저자는 철학자 베르그송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웃음에 대한 글에서이다. 즉 베르그송이 사람은 생명이 물질로 변화할 때 웃는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몸의 자태, 몸짓, 동작이 우리에게 하나의 기계 장치 같은 느낌을 줄수록 우습다는 것이다.

저자는 소치(笑痴)라는 말을 한다. 웃지 못하는 사람이란 의미이다. 저자는 스무 살 무렵의 긴 투병생활을 이야기한다. 너비 4미터 남짓, 길이 5미터 가량의 병실에 유폐되다시피한 변화 없는 생활이었기에 자신의 시간 감각이 항상 두서없고 터무니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마음 이야기만이 아니라 몸 이야기도 한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위가 아무 것도 받아주지 않은 것이었다고 한다. 열흘 정도 그런 상태가 계속되던 어느 날 저자는 물 반 컵을 토하지 않고 마실 수 있었다고 한다. 저자는 그 때의 기쁨을 감격이라 표현한다.(40 페이지) 우리 마음 속에 수성에서 인성, 신성 등이 공존한다고 말한 저자는 우리의 마음이 급변하는 것은 운명의 급변보다 더욱 불가사의하다는 말을 더한다.

저자는 사람이 관심하는 것이란 결국 그리 넓지 않은 까닭에서인지 자신이 좁아서인지 알 수 없지만 언제나 인간을 중심으로 한 곳을 맴돈다는 말을 한다.(34 페이지) 저자는 글루미 선데이라는 곡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우울한 일요일이란 의미를 지닌 이 곡을 이야기하며 저자는 이 노래 때문에 자살하는 자가 속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말도 한다.

저자는 안녕히 주무셨느냐, 진지 잡수셨느냐 하는 인사를 하는 우리의 습속이 가난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건강과 정신 상태를 염려한 것이라 말한다.(40 페이지) 저자는 흥미로운 말을 한다. 페르시아 신화 중 나이에 관한 이야기이다. 전능한 신이 천지를 창조한 후 각 생명들에게 수명 배당을 하는 이야기이다. 차별 없이 30년을 배당하자 불평이 이어졌다. 소도, 말도 각각 괴로우니 수명을 단축시켜 달라고 하고 인간은 너무 짧다고 연장시켜 달라고 했다.

신은 이에 동물들의 수명을 10년씩 단축시켜 인간에게 주었다. 인간이 덤으로 얻게 된 수명에 해당하는 시간은 그러나 동물들의 시간에 해당하는 힘든 시간이 아닐 수 없다는 의미이다. 물론 저자는 스무 살에 말 같은 삶을 사는 사람도 있고 칠십에 인간으로서 치밀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다는 말을 한다.

“아카시아가 피어 있었다. 아름다운 5월의 백주(白晝) - 주일학교에서의 귀도(歸途)였다. 중국인 공동 묘지를 지나치려 할 때 시야에 들어온 광경 - 풍유(豐裕)한 화교(華僑)의 장의(葬儀)였으리라. 호화로운 주단(綢緞)이 함부로 깔려져 있었다고 기억한다. 역시 강렬한 햇빛을 되받아 번득이는 붉은 주단이 덮인 관 앞에 엎드린 사람들 속에서 곡성(哭聲)이 낭자했다. 여덟 살의 어림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아주 무서운 광경이었다. 볕이 내려쪼이는 백주외 극채색의 악마적인 번득임과 어른들의 낭자한 곡성이 상징하는 죽음, 그것은 한동안 어린 나의 몽마(夢魔)가 되었다.”

이는 ‘병상(病床)에서’란 글의 시작부이다. 그때 어른이 우는 것을 처음 보았다는 저자는 경건한 신앙을 죽음에 기울이게 된 것은 묘지 아래에서 다감한 소녀 시절을 지낸 까닭인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저자는 묘지가 건너다 보이는 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그리고 한국전쟁을 겪으며 죽음의 참상을 수없이 목도했다.

저자는 방공호란 안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안전감을 위하여 필요한 것처럼 약은 완치를 기하는 것이 아니라 완치에의 가능성을 위한 것이 아닌가, 말한다. 그렇듯 무서운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의 의미라고 저자는 말한다.(53 페이지) 저자는 누운 채 창 밖을 볼 때가 많았다고 한다. 창에 제한된 하늘이, 앓는 시각에는 아쉬울 것이 없어 오척(五尺)에 미치지 못하는 공간이 그대로 우주인 것 같았다고 말한다.

저자는 아무도 생명을 예기(豫期)하지도 원하지도 않았던 이상 생명이란 우발된 것이요 필연적인 아무 것도 아닌데 이처럼 소중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말한다.(55 페이지) 산다는 것은 괴로움이고 치욕이라지만 치욕이든 광영(光榮)이든 산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인 것 같다고 말한다,(56 페이지)

켜졌다가 꺼지는 등불처럼 이 육체라는 우리에게 허락된 일정량의 물체 속에 깃들었다 나가는 덧없는 것이 목숨이라 해도 우리 인류의 시초가 아메바였다는 가설보다 에덴 동산의 아담과 이브가 우리의 선조였다는 신화 쪽이 얼마만큼 흐뭇한 것이 아닐까 하고 가만히 웃어본다는 저자는 서정주 시인의 가까운 별이 눈짓을 하고 오랜 종소리의 여운이 내 가슴 속에 울리고 있기에 이런 밤에는 파리를 매춘굴이라 부른 보들레르의 비통보다 새로운 예루살렘이라 노래한 위고의 감격이 진실된 것 같다고 말한다.(57 페이지)

저자는 병문안을 온 친구들이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는 발레리의 시를 읊고 슈베르트의 보리수를 불러주었던 이야기도 한다, 저자는 언니와 연년생으로 태어났다. 저자가 태어난 날은 10월 25일. 저자는 자기 생일은 날이 궂어본 일이 없다고 말한다. 끌리어 들어갈 듯한 파란 하늘. 가득히 퍼진 국화 향기, 햇곡식과 충성한 과일들 때문에 생일날은 모두들 모여든다고 말한다.

태몽 없이 태어난 까닭에 기다려졌던 존재가 아니어서 뒤뚱거리며 살게 마련인가 보다고 말한다.(66 페이지) 저자는 예술가라고 자처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저 자신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것을 이기지 못했다고 말한다. 칸나 같은 강렬한 꽃들을 그린 것은 훨훨 태워버려야 할 것들이 가슴에 뭉쳐 있었기 때문이라 말한다.

저자는 슬픔은 오히려 병을 이겨낸 후에 왔다고 말한다. 아버지의 눈에 화필(畫筆)은 딸의 생명을 앗아가는 흉기로 보였던 것 같다.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된 저자는 아버지와 오빠의 책들을 탐독하는 시간 속으로 들어갔다. 그저 책이 옆에 있어서 읽었고 즐거워서 읽었고 문학을 하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집에서 설흔이라 불렸다. 설흔까지만 살면 어른들은 돌아가실 테니까 끔찍한 꼴을 보지 않으실 것이라는 의미에서였다. 설흔이는 봄을 무사히 넘겨본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저자가 어느 해 봄 얼굴도 모르는 어느 청년의 아내가 되어 경기도 시골로 시집을 갔다. 부모끼리 정한 상대였다.

시집은 중시하(重媤下)였다. 시조모, 시삼촌, 시부모까지 있는. 종가였기에 수시로 제사를 지냈고 신문 한 장 읽는 것도 조심스러운 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자는 우연히 신문 조각을 보았다. 장편 소설 모집 공고였다. 낮에는 며느리로, 밤에는 아내로, 어머니로서의 노역을 치르고 일을 마치고 식구들이 잠든 심야에 등잔불을 켜고 썼다.

당선을 기대하기보다 쓰는 자체가 즐거웠다는 저자. ‘등불 드는 여인’이란 1400매의 소설이다. 그 이후 저자는 다시 두 편의 희곡을 써서 당선되었다. 저자는 문학 소녀가 아닌 그림 소녀였다. 어린 시절에 천직으로 알았던 그림을 포기한 것은 폐결핵 때문이고 글을 쓰게 된 것은 소녀 시절에는 상상도 못한 시집살이가 서러워서였다.(72 페이지)

저자는 누워서 책을 읽었다. 병이 일상이 되어 안정을 취해야했기에 생긴 습관이다. 도스토예프스키, 토마스 만, 릴케, 파스칼 등이 저자가 탐독한 작가들이다. 저자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성모님의 푸른 띠를 띤 시체는 성촉(聖燭) 아래 미소하는 신부처럼 성스럽고 아름다웠다.

먼저 간 남편을 다시 만나기를 굳게 믿고 있었던 그녀이기에 신부 같은 차림의 시신을 보고 자녀들은 이상한 슬픈 기쁨을 느꼈다.(86 페이지) 저자는 펄 벅 여사를 보며 이런 말을 한다. 나무가 겪은 모든 것을 연륜(年輪)에 새기듯 스스로의 얼굴에 연륜처럼 무엇인가를 새겨나가는 것이라고, 그러므로 40이 지난 사람들은 그들의 얼굴에 대한 책임을 져야 된다는 것이라고.(87 페이지)

저자는 펄 벅의 노벨상 수상작인 ‘대지’를 한숨에 읽고 그 전 해 수상작인 토마스 만의 ‘마의 산’에 비해 격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펄 벅 여사의 작품들을 거의 다 읽었다. 작가이기 전에 위대한 인간, 위대한 여성, 위대한 어머니였던 펄 벅.

저자는 김말봉(金末峰) 작가도 이야기한다. 친한 동무의 아주머니였던 그는 3.1 운동 당시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투옥되어 옥중에서 고문을 당해 오른쪽 귀가 아주 기능을 하지 못했다. 김말봉 작가는 저자에게 그림 삽화를 부탁했다. 저자는 김말봉 작가를 불운의 어머니라 말한다. 아이들에게 버선 하나 제대로 기워 신기지 못했지만 그토록 거룩한 어머니가 없다는 것이다.

김말봉 작가에게는 아들 딸 쌍둥이가 있었다. 보옥이란 이름의 여자 아이는 남녀 쌍둥이는 해롭다니까 여자인 자기가 죽어야 한다며 치료를 거부하고 열한 살에 죽었다.(94 페이지) 남은 남자 아이는 영이였는데 그는 일선에 통역으로 나갔다가 전사했다. 김말봉 여사는 우리 영이가 폐병 환자로 요양소 침대 위에서 죽지 않고 국가의 간성으로 싸워 죽은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말했다.(95 페이지)

공창 폐지를 부르짖었고 50이 지나 미국 유학을 간 김말봉 작가. 그는 기도하며 마지막 순간을 맞았다. 저자는 어려서부터 떠돌아다녔다. 저자는 이른 봄이면 부평초 피는 진주로 향수(鄕愁)가 향한다고 말한다. 푸른 보리 물결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111 페이지) 저자는 부모님은 그들의 고향인 서울에서 화분 가득히 그들의 고향 흙을 담아 거기에 자신을 심어 가지고 여러 고장을 돌아다니신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113 페이지)

저자는 공간의 근저에 혼돈을 볼 때 자신의 일그러진 원근감이라든가 위치감에 상통하는 무엇인가를 느껴 순수 공간이랄까, 그런 세계의 설정에 정열이 기울어진다고 말한다. 절대시가 거기 깃든다면 자신의 작품 세계는 완성되는 것이라 말한다. 저자는 그 세계로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다고 말한다. 작가와의 친교란 작품과의 교감이라 믿는다는 저자.(114 페이지)

저자는 양토추자 부득일토(兩兎追者 不得一兎)란 말을 한다. 두 마리 토끼를 쫓는 자는 한 마리 토끼도 잡지 못한다는 말이다. 저자는 자신의 슬픔은 까마귀의 슬픔이라 말한다. 이방인의 슬픔이다. 저자는 예술가는 표현하기 위하여 속이고 사회인은 숨기기 위하여 속인다는 말을 하며 근본부터 상극하는 이 두 세계에 발을 딛고 선 자신은 애초부터 한 개의 희화적인 존재인 것 같은 열등감을 어찌할 수 없다고 말한다.(117 페이지)

저자는 인간인 이상 사랑에 얽혔기에 자신도 초조하나마 사랑의 뒤안길에서 살았다고 말한다. 사랑의 본질이란 주는 것인지, 받는 것인지, 주고받아야 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자신의 경우 사랑을 안다는 것은 슬픔을 아는 것이고 슬픔을 알아서 한 장의 구김살 없고 단순했던 삶을 주름지게 하고 명암을 깃들게 하는 것이 되었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사랑으로 인해 성장했다는 것이다.(139 페이지)

저자는 남의 아내가 된 후 샤랑은 의지이며 인내이며 지속이라 느꼈고 어머니가 되어서는 사랑은 기원이며 무사(無私)이며 헌신이며 괴로움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저자는 아이에게 쏟는 이 동물적인 맹목의 사랑이 보다 고차의 사랑으로 승화되는 날 자신의 사랑은 완성을 보게 되리라 말한다.(141 페이지)

저자는 도스토예프스키 이야기를 한다. 그의 ‘백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에 등장하는 간질 환자의 발작 과정과 심리, 그리고 그가 발작 기간 동안에 체험하는 특이한 세계를 읽을 때 그 박진(迫眞)하는 묘사에 끌려들고 작가의 천재성에 감탄을 금치 못하다가 후에 작가가 간질 환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무슨 열쇠나 얻은 것처럼 무릎을 치며 아, 그래서 그렇게 잘 썼군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것은 도스토예프스키가 가진 작가적 역량과 정신의 소산이지 간질, 도박 등의 숙명 때문이 아니라 말한다.(145 페이지) 도스토예프스키가 천재적인 작가였기에 체험을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이지 그가 간질 환자였기에 걸작을 쓴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작가는 그의 작품에서 인물들을 창조한다고 말한다. 이름을 지어주고 성격을 부여하고 행동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인물들은 어느 사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가 있어 작가가 애초에 짠 계획에 반항한다. 고유의 생명을 가진 것처럼 작가의 손이 감당키 어려운 행동을 하며 모르는 사이에 작가 자신을 생각하지도 않았던 방향으로 끌고 간다는 것이다. 이럴 때 작가는 창조의 희열을 느낀다고 말한다.(146 페이지)


“꽃집 유리창 너머 곱게 웃는 카네이션, 지게 위에서 흔들리며 수다스럽게 웃는 개나리, 진달래, 길모퉁이에서 꽃파는 아주머니들 치마폭 옆에서 밀어(密語)를 마지 않는 데이지들 ㅡ 다들 곱고 귀엽기만 하다. 혹은 화려하게, 혹은 청초하게, 귀엽게, 복스럽게, 정답게, 향기롭게, 저마다의 모습으로 피어오른 꽃들 – 형형색색, 다른 꽃모습들이다. 그러면서 모두가 아름다움에의 의지로, 생에의 의지로 핀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고나 할까.”(153, 154 페이지)

저자는 살아왔다는 행적(行績)으로서의 시간감은 없고 흘러가 버렸다는 허무감만이 남는다고 말하며 일찍이 자신을 사랑했던 중부(仲父)께서 “혹자 기아 30년이라더니, 허“라고 하셨다는 사연을 소개한다. 그분은 불혹에 마음이 더욱 흔들리니 범부(凡夫)야, 아니 우부(愚夫)지란 말을 했다.

신영복 선생님은 석과불식(碩果不食) 즉 씨로 쓸 과일은 먹지 않는다는 말을 이야기하며 초겨울 가지 끝에 마지막 감이 남은 것에서 엽락(葉落)의 지혜를 얻어야 한다고 말한다. 신영복 선생님에 의하면 잎사귀를 떨어뜨리는 것은 환상과 거품을 청산하는 것이라 말한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논어’의 사십 불혹을 마흔이 되면 의혹이 없어진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바른 독법이 아니라 말한다.

신영복 선생님에 의하면 나이 마흔에 모든 의혹이 다 없어질 만큼 현명한 사람은 없다. 이 경우 혹(惑)은 의혹이 아니라 미혹(迷惑)이고 환상(幻想)이다. 가망 없는 환상을 더 이상 갖지 않는 것이 불혹이라는 것이다.(‘담론’ 420, 421 페이지)

9.28 수복(收復) 후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 1913 – 1974) 화백이 저자에게 수첩을 만들어주었다. 대학 노트를 잘라 칠하고 양쪽에 마분지를 붙인 수제 수첩이다. 표지 밑부분에 연꽃과 신라 불상을 연상케 하는 풍만하고 부드러운 소녀의 얼굴이 그려졌고 그 위에 구름과 날개를 접은 자세로 학이 한 마리 날고 있다. “수첩 하나 만들어 왔어요. 써 주세요”란 김환기 화백의 말에 저자는 “가장 뜻있고 진실되고 아름다운 말만으로 이 수첩을 채우겠어요.”라고 답했다.

하지만 그 수첩은 20년이 지나도록 슬프고도 부끄럽게 한 줄의 글도 그어지지 않은 채 서랍 속에 간직되기만 했다. 곱고 아름다운 것은 나중으로 돌리는 성격 때문이다.(211 페이지) 그 20년 동안 저자 마음에서 수첩은 떠난 적이 없었지만 결국 한 줄도 쓰지 못했다고 한다.

저자는 종말감이란 종말 그 자체와 다르다고 말한다. 인생의 문턱에서 지레 갖는 종말감이란 무책임하면서 얼만큼 감미롭고 어떤 도취감마저 섞이고 모순스럽게도 희망 같은 것조차 감돌고 있다는 것이다.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앓고 있다는 현실감은 없고 앓음으로 하여 특별한 대우, 정성스러운 사랑과 보살핌을 받아 짜증과 응석이 그대로 통하기도 한 그 특수 공간은 완전히 시간과 인생 밖에 있었다는 것이다.(251 페이지)

처녀로서는 어중된 나이여서 학업을 계속하기에는 많고 결혼이나 다른 경험을 하기에는 마음의 준비나 실제적 경험이 너무 없었다는 말로 결핵을 앓고 난 자신의 스물 두 살을 이야기하며 저자는 부모님의 명령을 어길 수 없어 한 청년과 짝지어져 남의 아내가 되었다고 말한다.(252 페이지)

사실 저자는 김말봉 선생을 통해 한 영국인 선교사 부인이 참한 한국 규수를 후계자로 찾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 되기를 원했었다. 우선 피아노와 회화를 익히게 하기 위해 1년 도안 자기와 함께 묵게 한 뒤 영국으로 유학을 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저자는 그러나 부모님으로부터 급히 오라는 말을 들었다. 혼인이 정해졌다는 것이다. “30년만에 서로 만나신 친구분의 자제야. 같은 소론(少論) 댁이니 다행이지?”란 어머니의 말에 저자는 싫다고 했다. 물론 소용 없었다. 영국에 가고 싶어 책만 읽던 저자는 모두가 귀찮고 싫고 억울했다.(263 페이지)

저자는 몸이 약한 소녀가 흔히 그렇듯 자신도 상상력이 유별났다고 말한다. 당시 일본은 한국 사람에게도 일본을 아국(我國)이라 부르도록 했다. 어느 날 한 일본인 작문 선생이 저자를 불렀다. 저자의 작문을 교우지(校友誌)에 실으려는데 몇 군데를 고쳐야겠다는 것이다. 작문은 그 선생이 낸 주제를 가지고 쓴 것이다. 그 선생은 매번 저자의 글을 교우지에 실어주었는데 시국에 관한 글에서 아국이라 하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저자는 일본이라 썼는데 작문 선생은 아국이라 고치자는 것이다. 끝내 눈물을 떨구기 전까지 이르러 저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생은 알았다고 하고 저자를 돌려보냈다. 작문은 실렸다. 그런데 아국이라고도 하지 않고 일본이라고도 하지 않고 선생이 어물어물 전후를 맞추어 놓았다.(268 페이지)

저자는 병석에 있던 18세때 토마스 만의 첫 작품인 ‘환멸’을 읽었다. 오전에는 책에 취했고 오후에는 열에 취한 시간이었다. 저자는 사람이 가지는 소망이나 절망은 언제가 그 사람을 앞질러 간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누구도 거기에 도달할 수 없다. 도달점이라 생각한 곳에 이르면 그것들은 벌써 그곳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토마스 만의 ‘환멸’에 나오는 주인공은 소년이다.

저자는 그 소년은 환멸이나 절망을 한 것이 아니라 배신을 당한 것이라 말한다. 신의의 배신이 아니라 소망의 배신이다. 그리고 그런 배신이 거듭될수록 그는 커갈 것이다. 배신하고 배신당하며 얽혀 사는 슬픈 인연을 알 것이다.(273 페이지)

저자는 몸이 약했고 잠이 없었다. 큰 결점이지만 장편 소설 공모에 보낼 글을 쓸 때는 그것이 도움이 되었다. 잠을 거의 안 자도 낮에 조는 일이 없었던 저자였다.(289 페이지) 저자는 1965년 국제 펜대회에 한국 대표로 가게 되었다. 이를 안 시아버지가 감개무량해 하던 것을 잊지 못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유수암(流水庵)이란 작품에 대해 말한다. 우연히 참석한 주석(酒席: 유일한)에서 본 초라한 노기(老妓)를 보고 몹시 언짢아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쓴 것이다. 전혀 다른 삶이기에 주변에 물었으나 시치미 떼는 사람들 때문에 저자는 논문을 쓰는 것인지 소설을 쓰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책들을 읽었다. 저자는 그 노기를 노류장화(路柳墻花)의 헛꽃으로 대하지 않고 한 음영(陰影) 짙은 인격으로 쓰고자 했다.(291 페이지)

“인생은 만남이다. 꼭 한 번 초대된 자리이다. 이 자리에서 초대된 모든 사람이 다 서로 인사를 나눈다든가 말을 주고 받는 일은 없다 해도 만남은 뜻있는 것이고 같은 성진(星辰) 아래 생을 받은 동시대인이란 참으로 신비로운 관계를 가지는 것이며 동시대인인 이상 설사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해친다 해도 해를 주고받았다는 그 사실로 두 사람은 이미 끊을 수 없는 깊은 관계로 맺어진 사이가 되는 것이다.”

독일 작가 한스 카로사(1878 – 1956)의 말이다. ‘루마니아인의 일기’ 등으로 유명한 이 작가의 말을 저자는 언제나 감명 깊게 되새긴다고 말한다.(311 페이지) 한스 카로사는 의사 출신의 문호이다. 그는 의사라는 직업을 무척 자랑스러워 했다. 이 말을 하는 것은 저자가 ‘그래도 사람을 사랑해야지’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이다. 저자에 의하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하나의 악으로 뱍 가지 악을 없애고 보다 뜻있는 일을 하기 위해 악의 상징인 고리 대금 노파를 죽이는 영웅적인 발상을 했다지만 오늘의 악당들은 돈과 여자를 갖기 위해 살인을 한다.(316 페이지)

정신적인 말세일까. 그러나 말세 의식은 몇 천 년을 내려오면서도 지녀져 왔으니 오히려 인간의 영혼이 탁세(濁世)를 살면서 아직 높고 깊고 거룩한 것에 둔 뜻을 거두지 않고 있다는 증거라 말하며 저자는 말세적인 현상을 통탄하는 마음은 귀한 것이고 작은 선을 얕보지 않는 마음씀이 더욱 가치 있다고 말한다.

김말봉 여사가 저자의 언니와 저자를 보며 언니는 아주 이성적이니까 영국식 어머니가 될 것이고 저자는 감성이 여리니 프랑스식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말을 했다. 저자는 언니는 말대로 현모(賢母)가 되었지만 자신은 프랑스식이 아닌 콩고식(원시적) 어머니가 되었다고 말한다.(369 페이지) 치고 때린 일은 없지만 맹목적, 동물적 사랑을 갖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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